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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태감의 지위는 명나라 때와는 천지 차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청나라말 대태감 이연영(李莲英)은 궁을 들어갈 때부터 나올 때까지 자희태후(慈禧太后)의 신임을 듬뿍 받았다고 한다. 이연영은 1856년 입궁때부터 1909년 궁을 떠날때까지 함풍(咸丰), 동치(同治), 광서(光绪) 3개의 왕조 즉 반세기 동안이나 이 술수가 난무한 자금성에서 살아남았다. 그에게 어떤 비결이 있는 걸까?
비결은 당연히 있었다. 그가 말하길 그의 비결은 딱 8글자 事上以敬,事下以宽(윗사람에게는 존경으로, 아랫사람에게는 관대함으로 대하라)라고 한다.
事上以敬(윗사람에게 존경으로 대하라)
<덕종이사(德宗遗事)>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1900년 8국 연합군이 중국을 침략했을 때 자희태후는 광서제를 데리고 서쪽으로 피난길을 올랐는데 그때가 일 년 중 가장 추울 때였다고 한다. 어느 날 밤 이연영이 자희태후의 잠자리 시중이 끝나고 광서제를 알현하러 갔는데 황제가 유등 앞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고 한다. 알고보니 황제의 방에는 유등과 의자뿐 침구류는 하나도 준비되어있지 않아 의자에 앉아서 졸고 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이연영은 광서제의 다리를 부여잡고 “소인을 죽여주시옵소서”라고 통곡하며 자신이 챙겨온 침구를 가져다줬다고 한다. 훗날 광서제는 이날 만약 이연영이 없었다면 오늘의 자신도 없다고 회고했다고 한다.
事下以宽(아랫사람을 관대함으로 대하라)
<궁녀담왕록(宫女谈往录)>중 이연영에 대한 소개는 이러하다.
“이연영은 아랫사람에게 너그럽고 관대하다. 이에 그를 미워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궁녀담왕록은 자희태후의 최측근 궁녀 영아(荣儿)의 회고록으로 당시 이연영은 이미 흙으로 돌아간 후라서 객관성과 정확성이 높다고 평가된다.
사실 이연영이 이렇게 궁에서 잘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事上以敬,事下以宽(윗사람에게는 존경으로, 아랫사람에게는 관대함으로 대하라)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희 태후의 성격을 꿰뚫고 있었다.
李莲英的好主意
1875년의 어느 날 자희태후가 성 밖을 나가 노닌 후, 군기대신들을 소집해 정원을 기한 내에 준공하라 명한다.
당시, 순친왕 혁현(醇亲王奕譞)이 군기대신을 맡고 있었는데 자희태후의 뜻에 따라 공부상서(工部尚书, 工部(우리나라의 국토교통부와 비슷), 尚书(장관))와 이 일에 대해 논의했는데, 정원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지만, 청나라말 국고는 이미 바닥을 보이는 상태였다. 순친왕과 공부상서가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자 순친왕은 이연영을 찾아가 방법을 강구하기로한다.
이튿날 순친왕은 공부의 대신들을 모두 수집해 회의하는 자리에 이연영을 초대해 이연영에게 이 사실을 모두 말하고 이연영이 자희태후과 관계가 좋으니 대신 이 사실을 말해주길 청한다. 하지만 이런 일에 휘말리기 싫었던 이연영은 한사코 고사를 하지만 순친왕의 간곡한 청을 이기지 못하고 아이디어를 하나 내놓는다.
“자희태후는 공사다망해 정원을 만들라는 말을 아마 기억을 못 할 것이다. 만약 태후가 정원 만드는 걸 재촉하지 않는다면 아마 까먹은 것이니 한쪽으로 치워놔도 괜찮을 것이다. 소인은 도저히 안 된다는 말은 못하겠습니다.” (“老佛爷事多,此项工程,或偶然兴至,欲修理耳。如不再催,似可暂置,奴才终不敢言也。”)
과연, 이연영의 말은 들어 맞았고, 이 일은 이렇게 흐지부지하게 끝이 나게 된다.
*이연영은 성품은 굉장히 뛰어났지만, 말로는 비참했다. 문화대혁명 때 이연영의 무덤은 다 파헤쳐져, 지금은 무덤의 위치도 시신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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